대학교 시절부터 학위 과정을 마치기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공부를 했는데, 돌이켜 보면 미숙했던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점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배운 것을 효과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일찍부터 갖지 못했던 것을 꼽을 것이다. 노트에 강의 내용을 적기도 하고, 중요한 자료는 스크랩을 하고, 논문을 읽고 하나씩 요약해 보기도 하면서 배운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극적인 효과가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시간을 들여 습득한 지식을 잘 보존하고, 잊지 않고 있다가 필요한 순간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기존 지식과 결합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는 매우 값진 능력이다. 우리 삶의 생산성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지식을 잘 쌓을 수 있도록 기록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자유로운 삶을 위한 생산성 갖추기). 안타까운 점은 정규 교육과정에서 지식을 기록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워야 할 기술이 아니라 그냥 할 수 있는 일로 여긴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지식을 잘 기록하는 것에 대해 먼저 고민하고 노력했던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그 중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제텔카스텐” 이라는 시스템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한다.

제텔카스텐: 노트 작성 시스템

제텔카스텐(Zettelkasten)은 독일의 사회학 교수였던 니클라스 루만이 사용한 노트 기록 시스템이다.

루만은 원래 공무원이었는데, 사회학에 관심이 많아 퇴근 후 사회학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도 배운 것을 간단하게 메모했는데, 메모가 유기적으로 쌓이지 않고 금방 잊혀진다는 것을 느끼고는 더 효과적으로 메모를 기록하기 위해 제텔카스텐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여가 시간에 공부를 하면서 노트를 작성하다가, 그는 메모들의 일부를 사용하여 원고를 작성해서 당시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이었던 헬무트 셸스키 (Helmut Schelsky) 에게 전달했다. 원고를 받은 셸스키는 즉시 루만이 당시에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빌레펠트 (Bielefeld)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당시 루만이 박사 학위는 물론 사회학 관련 학위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이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메모 상자를 바탕으로 1년만에 사회학 교수가 되기 위한 모든 자격을 획득하여 1968년 빌레펠트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1.

니클라스 루만이 사용했던 메모 상자 이미지

니클라스 루만이 사용했던 메모 상자. 9만여개의 노트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컴퓨터를 사용하여 더 쉽고 효율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그는 30년간 교수 생활을 하면서 역서를 제외지고도 58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심지어 그의 사후에도 연구실에 남아있던 원고를 바탕으로 6권의 책이 더 출간되었다고 한다. 한두 권의 책을 출간하기도 어려운 일임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생산성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그렇게 높은 생산성과 다작 능력을 유지하는지 궁금해하였고, 루만은 늘 그 원천으로 제텔카스텐을 언급했다.

그는 어떤 노트 시스템을 사용했길래 높은 생산성을 한결같이 유지할 수 있었을까? 또 그의 메모 상자에는 9만여개의 노트가 있었다고 하는데,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 본 사람으로써 그렇게 많은 노트를 잘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필요한 도구

제텔카스텐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도구가 필요하다.

  • 레퍼런스 저장 도구: 참고자료, 또는 정보의 소스를 저장하기 위한 용도이다. 인터넷의 문서, 논문, 책의 서지정보 등을 저장하여 우리가 정보를 얻은 출처를 저장해 두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프로그램으로 Zotero가 있으며, 나는 Zotero 와 Devonthink를 사용하고 있다 (참고: 제텔카스텐을 위한 레퍼런스 관리 도구).

  • 메모 상자: 메모를 작성하고 저장할 장소 또는 프로그램이다. 루만처럼 물리적인 상자와 종이를 사용해도 되지만, 더 간단하고 효율적인 프로그램들이 많이 존재한다. 내가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Obsidian이며, Roam Research도 유명한 프로그램이다. 사실 노트 간에 링크를 제공하는 기능만 있으면 기본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써도 구현이 가능하다 (참고: Obsidian: 마크다운 기반의 제텔카스텐 도구).

방법

제텔카스텐 시스템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종류의 노트가 존재한다. 임시 메모로 다른 일을 하던 중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다른 문헌에서 찾은 영감을 주는 내용을 문헌 메모로 저장했다가 최종적으로 영구 메모로 변환한다. 영구 메모는 이름대로 영구적으로 보관하면서 축적하고 개선해 나간다.

  • 임시 메모 (Fleeting Notes): 임시 메모는 저장 용도의 메모가 아니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나 기록하고 싶은 내용을 보았을 때 간단하게 적어 나중에 떠올릴 수 있도록 적는 메모이다. 짤막한 문장, 책에 긋는 밑줄, 링크, 키워드 등 다양한 형식을 가질 수 있으나 나중에 처리할 수 있도록 올바른 위치에 저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에 한두번 정도 검토를 거쳐 문헌 메모 또는 영구 메모로 만들거나 검토 중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삭제한다.
  • 문헌 메모 (Literature Notes): 읽은 내용 중 기억하고 싶거나 나중에 활용할 것 같은 내용을 적어두는 메모이다. 나의 언어로 원본의 출처를 밝혀 간략하게 적는다. 문헌 메모는 레퍼런스 저장 도구에 보관하거나 메모 상자 안에 보관한다.
  • 영구 메모 (Permanent Notes): 영구적으로 보관할 목적의 메모로, 임시 메모나 문헌 메모가 나의 관심사 및 기존에 있던 영구 메모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확인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연결을 발견하면 영구 메모로 적는다. 이 메모는 몇 년 뒤에 보더라도 무슨 말인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를 갖추면서도 너무 길지 않게 적고, 완전한 문장으로 적으며 하나의 노트는 하나의 주제만을 담도록 한다. 이 때 기존 메모와의 연결 (링크 활용) 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한다.

원리 & 팁

제텔카스텐을 운영하다 보면, 각자의 관심 분야가 다르고 선호하는 스타일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조금씩 자신의 스타일로 바꾸어 가며 사용하게 된다. 이것은 원래 제텔카스텐 시스템이 명확한 규칙에 따른 시스템이라기 보다는 방법론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다. 그래서 정답을 준수하려고 하기보다는 제텔카스텐의 어떤 면이 뛰어난지를 이해하고 그 원리 안에서 스스로의 취향에 맞춰 메모상자를 운영하는 것이 좋다. 아래는 내가 지키려고 하는 원리 및 best practice 들이다.

  • 하나의 노트, 하나의 아이디어: 제텔카스텐에서 중요하게 강조되는 요소로, 하나의 노트에는 하나의 아이디어만을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노트를 만드는 가장 직관적인 (또는 익숙한) 방법은 정보를 습득한 단위로 정리하는 것일 텐데 (책, 강의, 기사 등), 이러한 방식에서는 하나의 노트가 여러 아이디어를 포함하며 자신만의 맥락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노트와 비교하기가 힘들다. 처음에는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지식들이 서로 연결되고 계속해서 재사용되게 하려면 습득한 정보를 분해하여 하나의 아이디어만을 갖는 원자적 노트 (Atomic Notes) 들로 만들어야 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제텔카스텐의 핵심: Atomic Notes 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었다.
  • 노트 간의 연결을 많이 만들기: 제텔카스텐이 지식을 기억하는 것 뿐 아니라, 이를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찾아낼 수 있는 이유이다. 제텔카스텐의 가장 큰 장점은 기존에 알지 못했던 지식들 간의 연관성을 발견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노트 간에 더 많은 연결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참고 포스팅: 적극적으로 링크를 활용하라)
  • 내 언어로 작성하기: 책에 있는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내가 이해한 다음 나의 언어로 적어야 한다. 이렇게 직접 처리하지 않고 스크랩만 한 정보는 거의 다시 활용될 가능성이 없다. 또한 직접 요약을 하려고 하면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사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거나 두리뭉실하게만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 추측/계획보다는 사실/주장을 적기: 영구 메모의 내용은 “~인 것 같다”, “~하려고 한다” 와 같은 추측, 계획보다는 “~이다”, “~해야 한다” 와 같이 더 명확하게 적는 연습을 하는 것이 효과가 있었다. 추측이나 계획에는 근거가 필요하지 않지만, 사실이나 주장을 적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증거나 논거가 필수적이다. 결과적으로 노트 작성은 조금 더 불편해지지만 그만큼 나중에 노트를 볼 때 노트의 완성도나 설득력은 높아진다.

장점 & 효과

노트 시스템을 사용하는 일차적인 목표는 우리가 습득한 지식을 나중에 잘 꺼낼 수 있는 형태로 저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텔카스텐을 잘 운영하면, 그 외에도 수많은 장점들이 존재함을 경험할 수 있다.

  • 주의력 보존: 기록을 하는 이유는 잊지 않기 위해서이지만, 잊기 위해서 (현재 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이기도 하다. 처음 제텔카스텐을 시작해 보면 내 머리속을 떠도는 아이디어나 생각들이 꽤 많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의 단기 기억을 차지하며 주의력을 소모하는데, 노트 시스템을 통해 이런 생각들을 오프로딩해 놓으면 현재 하는 일에 마음놓고 주의력을 쏟을 수 있다 (참고: 자이가르닉 효과: 생각도 오프로딩이 필요하다).
  • 연결, 창의성: 지식을 저장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제텔카스텐은 생각을 개발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노트가 쌓이면서 서로 다른 분야의 연관성을 발견하거나,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관점을 발견하면서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생각을 개발해낼 수 있다 (참고: 적극적으로 링크를 활용하라).
  • 장기적인 생산성 향상: 자유로운 삶을 위한 생산성 갖추기에서 언급했듯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습득한 지식을 미래에도 계속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제텔카스텐은 원리 & 팁에 소개한 것처럼 지식을 재활용하고 서로 연결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 시스템이다.
  • 작은 단위로 글 쓰기: 지식을 기록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어딘가에 사용하기 위함인데, 지식 전달을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수단은 글일 것이다. 글쓰기는 글의 주제 결정, 자료 조사, 글 작성 등 다양하고 어려운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 자리에 앉아 끝내기 위해서는 많은 주의력과 의지력이 필요하다. 제텔카스텐은 이런 글쓰기를 수행 가능한 (Actionable) 단위로 나누어 수행하게 해 주며, 나중에 글을 쓸 때에는 노트를 잘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기본적인 글의 뼈대가 완성되기 때문에 좋은 글을 쉽게 완성할 수 있다. 즉 점진적인 bottom-up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다.

적용하기


본 포스팅에서는 지식을 저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텔카스텐을 구현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제텔카스텐은 사용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구성을 하는 경우가 많고,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들도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Andy Matuschak의 Evergreen Notes가 대표적이다. 제텔카스텐을 실제로 어떻게 구현하는지 궁금하다면 꼭 방문해 보시기를 추천한다). 본 포스팅도 오리지널 제텔카스텐의 세부에 집중하기보다는 전반적인 흐름을 내가 사용하는 방법을 기준으로 소개하였다.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팅 (글 목록) 및 참고자료에 있는 <제텔카스텐> 책을 참고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참고한 자료

  1. <제텔카스텐>, 숀케 아렌스, 2021. 

댓글

LeeKunH

요즘 공부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기록하고 관리할 수 있을까?, 기록/관리하는 생산성-효율을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던 중 “옵시디언” 기록 도구와 “제텔카스텐” 방법론?에 대해서 알게 되어 검색하던 중 해당 블로그를 발견했습니다.

해당 블로그에 제가 원하는 내용들이 너무나 잘 정리되어 있고 작성되어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전체적인 내용을 쭉 읽었습니다.

좋은 내용 및 정보 공유 감사드립니다.

+추가질문 => 옵시디언을 사용하면서 “퍼블리쉬” 기능이 있다고 하는데 이 블로그 역시 옵시디언을 퍼블리쉬 기능을 사용하신 게 맞을까요?

저 역시 제 로컬 환경에서 기록한 노트들을 블로그와 연동? 퍼블리쉬? 하고 싶은데 추후 이 내용에 대한 포스팅도 해주시면 감사하게 읽겠습니다.

Everglowing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옵시디언의 Publish 는 옵시디언 저장소를 그대로 웹페이지에 게시해 주는 서비스로 알고 있습니다 (공식 Help 페이지가 Obsidian Publish 로 되어 있죠). 이 블로그는 Jekyll 이라는 마크다운 기반 웹사이트 생성 도구를 사용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텔카스텐 노트와 공개되는 글은 별개로 작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본문에서 소개한 Evergreen Notes 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Write notes for yourself by default, disregarding audience). 추후 관련된 글을 작성하게 되면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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